현명한 주부의 식탁, 콩나물

우리 식탁에서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콩나물. 콩에서 비롯된 콩나물을 누가 개발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 땅의 가난한 자들에게 일용할양식이 되었다. 가난한 민초들의 삶을 걱정했던 성호 이익 선생은 ‘콩을 갈고 콩나물을 썰어서 한데 합쳐 죽을 만들어 먹는데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며 자신이 실천한 내용을 《성호사설》에 적어놓았다.

 

기적에 가까운 생명의 전환

시루에 콩을 넣고 검은 천으로 덮은 다음 물을 붓는다. 물을 먹은콩에서 싹이 자란다. 5일 정도 지나면 딱딱한 콩이 아삭거리는 노란콩나물로 변한다. 기적에 가까운 생명의 전환이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생겨난 콩은 한민족 음식사에 밥만큼 중요한 작물이다. 된장과 간장, 고추장, 두부가 다 콩으로 만들어졌다. 물로만 자라는 이 특이한 콩나물을 누가 개발했는지는 알 길이없지만 놀라울 뿐이다.

 

한민족의 콩나물에 대한 최초의 기록

한민족의 콩나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의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1236)에 콩에서 나온 새싹, 대두황(大豆黃)이 나온다. 허균이 쓴 《한정록(閑情錄)》(1618년)에는 두아채(豆芽菜)에 관한 설명이 두 번 나온다.

‘녹두(菉豆): 4월에 심었다가 6월에 수확하고, 이때 씨를 재차 심어서 8월에 또 수확한다. 이는 1년에 두 번씩 익는 콩으로 두분(豆粉) 및 두아채를 만들 수 있다. 두아채: 녹두를 좋은 것으로 가려 이틀 밤을 물에 담가 불려 새 물로 일어서 말린 다음, 갈자리(蘆席)에 물을 뿌려 적셔서 땅에 깔고는 그 위에 이 녹두를 가져다 놓고서 젖은 거적으로 덮어두면 그 싹이 저절로 자란다.’

두아채는 원대(元代)의 백과사전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 이름과 제조법이 처음 등장한다. 《한정록》은 이를 인용한 것이다.

 

녹두로 만든 나물을 우리는 녹두나물이나 숙주나물로 부른다. 콩나물과 거의 비슷하지만 같은 재료는 아니다. 녹두로 만든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1924년에 지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처음 나오는데, 신숙주를 미워한 사람들이 만두소로 넣어 짓이겨 먹는다는 의미로 붙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쉽게 상하는 숙주나물의 특성이 변절한 신숙주와 닮아서 붙인 이름이라는 속설도 있지만 믿기 어렵다. 그보다는 콩이란 뜻의 숙(菽)자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한정록》에는 콩도 등장하는데 콩나물로 만들지 않은 것도 조금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먹거리

《성호사설》 서문에는 ‘콩죽 한 사발과 콩나물로 담은 김치 한 접시, 된장으로 만든 장물 한 그릇으로, 이름을 삼두회(三豆會)라고 하였다. 어른과 아이가 모두 모여서 다 배불리 먹고 파하였으니, 음식은 박하지만 정의는 돈독한 데에 무방하였다’란 아침 이슬처럼 청아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콩의 이로움을 적었다. 《성호사설》에도 나오지만 콩나물은 오랫동안 가난한사람들의 먹거리였다.

 

전주 지역의 명물, 겨울철 음식의 한계를 넘어

일제 식민시대, 경성의 빈민에게 콩나물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는 기사들이 1920년대에 자주 등장한다. 콩나물은 《사류박해(事類博解)》(1855년)에는 黃卷葅(황권저)로, 《일성록》 1795년 1월 21일자에는菽菜(숙채), 1796년 2월 11일자에는 太芽(태아), 《만기요람》에는 黃芽(황채)로 나오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콩나물은 사시사철 전국어디에서라도 먹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콩나물이 가장 유명한 지역은 전주였다.

 

《경향신문》 1977년 11월 5일자에는 ‘전주 사람들이 콩나물을 즐기게 된것은 대략 80년 전(19세기 말) 전주에는 수질상으로 보아 풍토병인 토질을 막기 위해 사흘이 멀다하고 콩나물을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수세기 동안 구전돼오면서 향토의 관습으로 돼버렸다’라고 나와 있다. 전주 토박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주의 어느 가정이라도 겨울이면 콩나물을 길러 먹었다고 한다. 외식도 예외는 아니어서 《별건곤》 1929년12월 1일자에는 소금으로만 간한 콩나물국을 술과 함께 마시는 ‘全州名物(전주명물) 탁백이국’이 나온다. 전주의 콩나물 해장국은 물론이고 비빔밥에 수염 뿌리 없는 어린 콩나물을 반드시 넣어 먹었다.70% 정도 자란 콩나물은 다 자란 콩나물과 달리 고소한 맛이 난다. 북어와 콩나물을 넣고 끓인 해장국은 술꾼들에게 구원의 음식이다.

《동아일보》 1931년 10월 3일자에는 성호 이익 선생의 삼두회에서 먹던 것과 비슷한 삼태탕이 등장한다. ‘콩나물을 연하게 잘 기른 걸로 꼭지 따고 정히 씻은 후에 기름 없는 정육을 잘게 썰고 흰파와 호초가루를 치고 맛있게 주물러 솥에 넣고 볶다가 북어를 토막쳐 넣고 두부를 반듯반듯 하게 썰어 넣은 후에 간 맞춰 물을 붓고 매우 끓거든 퍼내어 고초가루를 처서 먹습니다. 콩으로 만든 것이 두부와콩나물과 명태까지 들어 있어서 삼태탕이라고 합니다. 대체 콩나물이 몸에 유익하다 하야 온갓 나물에 제일로 채고여러 가지 국과 지짐이에 넣어 먹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북어 해장국이 삼태탕과 거의 같은 음식임을 알 수 있다. 이익 선생은 ‘콩나물죽이 없었든들 선비는 무엇으로 살꼬.’(《동아일보》 1936년 1월 1일자)라고 말했다. 가난한 선비와 더 가난한 농부들의 생명의 음식이이제는 한국인들의 가장 중요한 식재료로, 겨울에 주로 먹던 음식이 사철 먹는 일상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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